얼마 전(여기서 얼마 전이란 몇 년 전입니다. ㅎㅎ) 국내에서 손꼽는 사브 마니아를 다시 만난 적이 있다. 사브에 대해선 혹평과 호평을 거침없이 쏟아 놓는 그를 만난 것도 참으로 오랜 만이다. 그에게 물었다. 앞으로 사브가 어떻게 될 것 같냐고.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 조용히 "사브는 사브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기에 미래가 밝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 매력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라고. 그는 또 다시 생각에 잠기더니 되레 반문을 해왔다. "사브를 타 본 적이 있죠? 타보신 분이라면 표현하기 어려운 매력을 느끼셨을 텐데요". 이후 대화의 화제가 달라져 더 이상 얘기를 나눌 수 없었지만 그의 말은 사실 '오답 같은 정답'이었다. 겉으로 사브의 매력을 평가하는 게 오답이라면 정작 타본 사람만이 사브의 매력을 안다는 것이 정답인 셈이다.
9-3X 인테리어 컨셉트
첫 SUV의 등장
1949년 사브 92를 처음 내놓은 이래 사브는 안전성, 고성능을 동시에 추구해 왔다. 디자인의 경우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화된 모습을 보여 왔지만 안전성과 고성능 추구는 사브의 영원한 화두라는 게 많은 사람들의 평가다. 또한 여기에 실용성을 가미하려는 사브의 노력은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한 우물을 파겠다는 나름의 명확한 철학이 담겨 있다. 창업 때부터 안전성, 고성능을 기업의 가치로 삼아 왔으니 적어도 전통이란 부분에선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사브만의 독창성을 고집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0년 들어 사브의 변화는 우선 차종의 다양화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사브가 많은 차종으로 선택폭을 넓힌다는 뜻은 아니다. 기존의 차종을 조금씩 변형시킨 틈새차종과 함께 시장의 트렌드에 따른 차종을 하나 둘씩 추가한다는 의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2000년대 들어 사브가 처음 내놓은 9X 컨셉트카다. 사브 최초의 모델인 92를 디자인 모태로 태어난 9X는 쿠페와 로드스터, 왜건, 픽업 등 4가지 형태를 모두 반영한 실용적인 차종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사브는 이 차를 '스포츠카'로 불렀다. 스포츠카 성격에 걸맞는 3,000cc급 V6 터보엔진으로 최대출력이 300마력에 달했고, 스포츠카의 특징으로 꼽히는 2도어를 채택해 사브만의 독창성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2005년 사브 9-2X
9X의 등장은 사브에 있어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는 사브도 다양한 차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함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간 사브는 판매차종이 많지 않다는 게 약점으로 지적돼 왔다. 하지만 9X를 통해 사브는 '일본이나 미국 메이커와 달리 전통을 지켜내기 위해 차종 다양화에 매진하지 않았던 것'일 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획기적인 차종을 내놓을 수 있음을 전 세계에 보여줬다.
아울러 두 번째는 제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전통적인 디자인 만큼은 사브의 정체성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는 점이다. 특히 라디에이터 그릴은 가운데 중심을 두고 좌우 분리된 그릴을 채택, 기존 모델과 크게 차별화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보디라인은 면(面)을 적극 활용해 미끄러지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1949년 사브 92가 유선형 보디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9X 또한 깔끔한 평면으로 입체감을 살려 시선을 사로잡았던 셈이다.
사브 9-3 세단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02년에는 사브 최초의 SUV인 9-3X 컨셉트카를 내놓았다. 미래형 스포츠 SUV 컨셉트로 온-오프로드 기능은 물론 사브 9X의 디자인 컨셉트를 그대로 이어받은 9-3X는 또 다시 사브의 진면목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했다. 9-3X는 3도어 해치백 타입의 크로스오버 쿠페다. 하지만 사브는 9-3X의 출발점을 스포츠카와 험로주행으로 삼았다. 아울러 9-3X의 모태가 된 9X가 쿠페, 로드스터, 왜건, 픽업 등 지나치게 다양한 컨셉트를 구현하려 했다는 비난도 어느 정도는 반영해 개념을 단순화 시켰다.
하지만 고성능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사브는 9-3X에 V6 2.8 터보엔진을 장착했고, 이를 통해 최대 280마력으로 0-100km/h까지 6.2초에 달릴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중․저속에서의 가속성을 높이기 위해 1,700~5,500rpm의 넓은 영역에서 41.1kg·m의 최대토크를 발휘토록 설계한 점도 고성능을 향한 집념으로 평가받았다. 네바퀴 굴림 방식의 경우 평소에는 앞바퀴 굴림으로 작동하다 눈길이나 빗길 등에선 네바퀴 굴림으로 자동 전환되도록 했고, 급격한 굴곡을 지나거나 구동력의 변화가 생길 때 차체를 안전하게 잡아주는 주행안정장치(ESP)와 트랙션 컨트롤(TCS) 및 코너링 브레이크 컨트롤(CBC) 등으로 안전성도 향상시켰다.
9-3 스포트콤비
이처럼 9X와 9-3X 등의 잇따른 컨셉트카 출시는 결국 2004년 사브 최초로 AWD와 수평대향 엔진을 탑재한 9-2X와 SUV인 9-7X로 이어졌다. 9-7X에는 알루미늄 재질의 직렬 6기통 4,200cc 275마력과 V8 5,300cc 300마력 등 두 가지 엔진이 탑재됐다. 아울러 4WD 시스템이 적용됐고, 견인능력은 3톤 이상에 달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9-7X의 경우 사브가 미국 SUV 시장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냈다는 점이다.
사실 미국 내 중형 SUV는 해마다 빠르게 성장하는 대표적인 시장이다. 97년 4만5000대 달했던 중형 SUV 시장은 지난 2004년 47만대로 대폭 성장했다. 이는 각 메이커들의 독자적인 행보에도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전통적으로 SUV에 강한 면모를 보여 왔던 미국과 일본이야 그렇다 해도 스포츠카 개발에만 몰두해 왔던 포르쉐조차 SUV 개발에 나서게 됐기 때문이다. 결국 9-7X는 미국 시장의 대세를 따른 사브의 야심작인 셈이다. 또한 사브 구매자의 40%가 SUV를 보유중이고, 30%는 SUV를 찾아 사브를 떠난다는 통계는 사브 경영진에게 SUV 개발을 시사했고, 9-3X로 시장 반응을 살핀 뒤 9-7X를 내놓게 한 배경이 됐다.
실제 사브는 지난 2003년 미국에서 4만8,000대를 판매했다. 이는 미국 진출 47년 사상 최대 실적이다. 이전 미국 내 최다 판매기록은 1986년에 세운 4만7,000대가 전부였다. 이후 지속적인 하락세를 면치 못하다 2000년 들어 조금씩 판매가 되살아나는 중이다. 이와 같은 흐름에서 사브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미국 시장을 겨냥할 수밖에 없고, SUV 개발은 필연이 되었던 것이다.
9-3 컨버터블
그러나 사브 경영진은 SUV 개발에 나서면서 중요한 판단을 한 가지 해야 했다. 사브의 정체성과 미국을 어떻게 접목시켜 나갈 것인지가 그 과제였다. 사브는 앞서도 언급했듯 고성능과 안전성이 대명사이자 철학이다. 그러나 고성능은 대배기량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저배기량에 갖가지 출력향상 기술을 접목해 이뤄낸 결과다. 하지만 미국 시장에서 SUV는 대배기량이어야 했다. 미국 소비자들은 SUV의 경우 최소한 3,000cc 이상이어야 했고, 출력보다는 힘이 얼마나 좋은 지를 나타내는 토크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강했다. 결국 사브는 이를 겉과 속의 조화로 완성시켰다. 모든 스타일은 사브의 아이덴티티를 따르되 엔진은 미국 시장에 맞는 대배기량을 선택하는 방법으로 접점을 찾아낸 것이다. 9-7X에 4,200cc와 5,300cc 엔진의 탑재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들 엔진은 사브 역사상 가장 배기량이 큰 것으로, 미국 내 SUV 시장의 절대 강자인 GM 산하 GMC에서 도입했다.
세단의 다양화
SUV와 함께 사브는 2000년대 들어 세단의 라인업도 강화했다. 우선 사브는 2003년 뉴사브 9-3 라인업에 세단과 컨버터블에 이어 해치백 형태인 스포트콤비를 보강했다. 9-3라는 하나의 DNA 내에 세단과 컨버터블, 해치백 등으로 선택폭을 다양화 한 셈이다. 이 가운데 9-3 컨버터블은 1996년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컨버터블'로 선정된 사브 900 컨버터블의 뒤를 잇는 것이어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 사브 개발자들은 뉴 9-3 컨버터블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사브의 전통인 고성능과 안전성 확보를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자부하고 있다. 특히 컨버터블의 취약점인 안전성의 경우 6,000건이 넘는 실제 상황에서 일어난 충돌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이 차만의 안전성 보강대책이 마련됐다고 전한다.
9-5 왜건
사브는 현재(2005년) 9-3의 엔진 배기량을 6가지로 운용, 판매하고 있다. 크게 보면 1,800cc와 1,900cc 외 2,000cc와 2,800cc 엔진이지만 이를 터보와 디젤 등으로 세분화 해 차종 선택폭을 넓혀 놓았다. 아울러 차종을 리니어(Linear)와 아크(Arc), 에어로(Aero) 등으로 나눠 운용한다. 이는 차종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으로, 리니어가 엔트리급이라면 에어로는 성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사브의 대표 중형세단 9-5도 현재 세단과 왜건 라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엔진의 경우 2,000cc와 2,300cc, 그리고 3,000cc가 탑재되며 9-3와 마찬가지로 터보와 디젤 등에 따라 6가지로 세분화 돼 탑재된다. 그러나 2,300cc 터보 엔진의 최대 출력이 250마력에 달하는 등 고성능 엔진이라는 사브의 전통은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
미래를 향한 도전의 실패
지금까지 4회에 걸쳐 사브의 역사를 더듬어 보았다. 물론 4회의 글이 모두 완성된 때는 사실 2005년이다. 이후 사브는 부진을 면치 못했고, GM은 결국 사브를 네덜란드 스파이커에 매각했다. 스파이커도 인수 1년이 되지 않아 자금 융통을 하지 못하고 스웨덴 법원에 파산신청을 했다. 처음 출발 때부터 고성능과 안전성을 모두 지켜내겠다는 사브의 의지는 60년이 다 돼 가는 지금,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다. 6년마다 신차종 또는 컨셉트카를 하나씩 선보이겠다는 공언은 허언이 됐다. 스웨덴 정부가 파산신청을 받아들이고, 부채를 탕감한 뒤 새로운 주인에게 매각을 하는 게 정설이지만(인도 마힌드라&마힌드라가 관심을 보인다고 한다) 어쨌든 사브의 정체성을 더 이상 가져가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해서 저의 4회에 걸친 사브 연재도 마칩니다. 사실 이 글은 2005년 사브매거진에 연재했던 글을 여러 사람이 공유하고자 게재한 겁니다. 아무쪼록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휴우,,,,
출처 - http://blog.daum.net/carmania486/15949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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