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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반대말은 악이 아니라 최선이다

by dude C 2010. 6. 12.

스티븐 스필버그의 신작 뮌헨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인질로 잡고 있던 이스라엘 선수단을 살해한 사건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역작입니다.

분노한 이스라엘 정부가 정보기관 모사드의 정예 요원 애브너에게

테러의 배후 인물들을 처단하도록 지시하면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펼쳐지지요.

애브너가 유럽을 누비며 하나씩 암살해나가자

팔레스타인측도 곳곳에서 보복 테러를 일으켜

사태는 점점 악화됩니다.

 

애국심에 불타는 암살자 애브너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오랜 기간 가족조차 돌보지 않고

혼자 유럽에 머물면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활동했으니까요.

그런데 모든 것을 바쳐 최선을 다한 것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들 최선을 다했는데,

도대체 무엇이 잘못이었을까요.

 

인류 역사에서 최악의 순간은

종종 최선을 다하려는 인간들이 빚어냈습니다.

이 땅에 천국을 직접 건설하려던 자들의 꿈이

결국 생생한 지옥을 구현했다고 할까요.

 

1970년대 폴 포트는 불과 3년 7개월 동안

당시 캄보디아 인구 3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그건 공산 혁명을 일으킨 폴 포트가

자신이 꿈꿨던 농업 이상 사회의 실현을 위해

중상류층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려 했기 때문이었지요.

모택동이 사주한 문화 혁명 역시

기존의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대중에게 권력을 돌려주겠다는 미명으로 진행된 참극이었고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20세기에 정치적인 동기로 학살된 사람의 숫자가

무려 1억7000여만명에 달한다고 추정했습니다.

이건 지난 세기만의 예외적 사례가 아니지요.

세상을 정화하고 흑마술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중세 마녀 사냥을 포함해

모든 학살에는 숭고한 명분이 있었으니까요.

히틀러의 유언장은 이런 말로 끝을 맺고 있지요.

나는 무엇보다 세상을 오염시키는

국제적인 유태인 집단에 강경하게 맞서고

인종 관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이 나라와 국민을 최선을 다해 이끌었다.

나는 나의 책무를 다했다.

 

어쩌면 의 반대말은

이 아니라 최선인지도 모릅니다.

최선이라는 말 속에는

스스로가 강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오만과

자기 기만이 있습니다.

최선이 위험한 것은

물러설 자리를 예비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타협적 선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왜냐면 선이란 바로 조화를 뜻하는 말이니까요.

악은 항상 악하지만

선을 가장할 때 가장 악합니다.

그리고 최악의 폭군은

모든 이의 가슴 속에 길이길이 남으려는 사람입니다.

 

맹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오지요.

화살 만드는 사람이라고

어찌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인자하지 못하랴.

그러나 화살 만드는 사람은

사람을 상하지 않게 될까 걱정하며 만들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사람을 상하게 될까 걱정하며 만드느니라.

 

그저 주어진 역할이 다를 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어찌 그리 쉽게 나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살면서 화살을 만들기보다는

갑옷을 만드는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바랄 뿐이지요.

인간의 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삶은 ‘차선만으로도 벅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