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naver.com)
추상회화 선구자②
피에트 몬드리안,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1930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진짜 그렇게 있을 거요?"
"네." "햇빛을 가득 품은 정원 풍경이 끝내주는데도?" "관심 없습니다." "자연을 이렇게나 싫어하는 화가는 또 처음이군." "칸딘스키 선생님. 자연은 불쾌하고 지저분합니다. 특히 자연을 구성하는 무질서한 곡선들을 보면 숨이 턱 막혀요." 추상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이 꽉 막힌 화가의 고집을 꺾지 못합니다.
애초 칸딘스키는 '이 사람이라면 말이 통하겠다!'란 생각에 그를 직접 집에 초대했습니다. 이 화가의 그림도 자기 그림처럼 선과 색이 가득했습니다. 이 자는 내 동지다…! 추상 회화의 세계를 향해 외롭게 항해하고 있는 칸딘스키는 잃어버린 형제를 만난 기분이었지요. 들뜬 칸딘스키는 이 화가가 오기 직전까지 집을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특히 정원의 풀과 나무를 깔끔하게 다듬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좋아. 이 사람을 거실 의자에 앉히면, 창밖으로 기가 막힌 정원 풍경을 볼 수 있을 거야.' 칸딘스키는 정성껏 가꾼 정원을 감상하며 추상 회화를 논할 생각에 가슴이 터질 듯했습니다.
"어서 오시게. 반갑네, 반가워!"
약속의 날, 칸딘스키는 이 화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활짝 웃었습니다. 평소의 깐깐한 표정은 꽁꽁 묶어놨습니다. 그만큼 반가웠던 겁니다.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선생님." 이 화가는 뻣뻣하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얼핏 봐도 붙임성이 있는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여기, 여기로!"
칸딘스키는 이 화가를 거실로 이끌었습니다. "이 의자에 앉게. 잠깐만 기다려주겠나? 내가 차를 꺼내옴세." 칸딘스키는 그를 반강제로 앉힌 뒤 주방에서 찻잔 세트를 챙겨왔습니다.
그런데….
"이보게. 의자를 왜?" 칸딘스키는 이 화가가 의자 방향을 '굳이' 정원을 아예 볼 수 없는 쪽으로 돌린 것을 봅니다. "아니, 정원 풍경 좀 즐기라고 일부러 거기에 놔뒀는데…."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는 자연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화가가 딱딱하게 답합니다. 죄송한 표정은 아니었습니다. "이봐. 사방이 평화로운 녹색 천지인데? 명상도 하고, 예술도 논하기에 딱 좋은 풍경 아닌가?" "네, 아닙니다. 선생님."
얘 뭐야…. 나랑 같은 과(科) 아니었어?
"자연의 모습은 제멋대로예요. 나무와 풀은 제멋대로 쭉쭉 뻗어있지요. 그 곡선과 사선이 자아내는 카오스를 참을 수 없어요. 그뿐인가요. 날씨가 조금만 더워져도, 살짝만 추워져도 색깔과 모양을 바꾸는데, 그 변덕은 눈 뜨고 봐주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자연도 싫고 녹색도 싫다?" "그렇습니다." 칸딘스키는 이 화가의 답을 듣고 이내 웃음을 터뜨립니다. 아, 이런 기분이구나! 평생 별종으로 산 그가 처음으로 '닮았지만 다른' 또 다른 별종을 마주한 겁니다.
두 사람은 추상 회화를 그린다는 점만 같을 뿐, 내다보는 지향점은 정반대에 가까웠습니다. 칸딘스키를 감싸던 당혹감은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그 대신 호기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그래. 더 이야기해보게. 차는 괜찮지? 차 한 잔 드시게. 정원은 내가 실컷 볼 테니 알아서 하고." 이 화가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살짝 미소를 짓습니다.
자기만의 세계관이 단단한 이 화가의 이름은 피에트 몬드리안(1872~1944)입니다. 칸딘스키와의 일화에서 보듯 이 사람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칸딘스키처럼 몬드리안도 추상 회화의 선구자입니다. 다만 칸딘스키가 '뜨거운 추상' 세계를 열었다면, 몬드리안은 '차가운 추상'에 깃발을 꽂았습니다.
피에트 몬드리안,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일부 확대), 1930
수직선과 수평선의 그림인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입니다.
극단적인 추상화입니다. 빨강, 파랑, 노랑 등 원색으로 채워진 면과 검은색 선, 흰색 바탕이 전부입니다. 대각선도, 꼬불대는 선도 없습니다. 그리드(grid·격자 형식의 무늬)가 떠오릅니다. 단순한 색채, 안정적 비율이 이 작품의 핵심입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작품은 깔끔하고 편안합니다.
큰 충격보다도 은은한 존재감을 뿜어냅니다. 톡 쏘는 재미는 없지만 질리지 않을 그림입니다. 그림보다 가구 같기도 합니다. 계속 봐도 눈과 마음 모두 자극을 받지 않습니다. 어디에 걸어놔도 어색하지 않을 작품입니다.
피에트 몬드리안,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일부 확대), 1930
어떤 이는 "이것이야말로 나도 그리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이야말로 '딱 입시미술 수준'도 안 되겠다"는 말도 나올 수 있겠습니다. 누군가는 그나마 다채롭기라도 한 칸딘스키의 추상화(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참고)가 선녀 같았다고 그리워할 겁니다. 이 그림은 왜 유명해졌을까요. 그 사연을 아는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몬드리안은 또 다른 추상 회화의 선구자입니다.
칸딘스키가 '뜨거운 추상'을 지휘할 때 조용히 '차가운 추상' 제국을 세운 장본인입니다. 차가운 추상은 깐깐한 규칙 속에서 만들어진 딱딱한 추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선의 굵기, 면의 크기, 색상의 톤, 구성과 배치에서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가령 마주하는 두 선은 반드시 직각이어야 하고요.
곡선, 방향이 모호한 사선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화폭 속 직사각형도 황금비율(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정한 1대 1.618, 미적으로 완벽한 비율)을 따라야 합니다.
색도 마음대로 칠하지 못합니다.
주로 빨강, 파랑, 노랑 등 삼원색과 흰색, 회색, 검은색 등 무채색을 씁니다. 녹색이든, 보라색이든 삼원색과 무채색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색은 뒷방 신세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는 감정을 계속 억눌러야 합니다. 화폭에 환희, 흥분, 분노 같은 감정이 묻어나면 안 됩니다.
몬드리안, composition in colours_composition no. 1 with red and blue, 1931
이 정도면 강박입니다.
차가운 추상을 향해 걷는 길은 스스로 고통을 주는 고행(苦行)길이었습니다. '이 기법도 쓰지 말고, 저 기법도 쓰지 않는' 조건으로 선과 삼원색만 툭 던져둔 채 최고의 그림을 그리라는 주문과 같은 겁니다. 빈센트 반 고흐나 에드바르 뭉크 등 폭발적인 감정에 기댄 표현주의 화가라면 진작에 괴성을 지르며 도망쳤을 겁니다.
에드바르 절규. 그림을 그릴 때 이렇게나 감정을 폭발시킨 뭉크가 ‘차가운 추상’을 접했다면 뒷걸음질 쳤을 듯.
차가운 추상의 길을 택하면요.
선 하나를 긋는데도 하세월이 걸립니다. 색 하나를 채울 때도 수백 번씩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치의 오차 없는 선과 면의 구성을 생각하다 보면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어느 지독한 대학 교수가 논문이나 에세이를 'ㄷ'과 'ㅇ' 없이 쓰되 그 안에 생각과 느낌, 감동을 온전히 담아야 한다고 지시한 일과 비슷한 겁니다. 몬드리안의 단순해 보이는 그림들은 사실 이런 뼈를 깎는 고통에서 탄생했습니다. 그의 그림 속 선의 위치, 면의 크기가 조금만 달라져도 '확 깨는' 건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몬드리안은 왜 자신을 고통에 빠뜨렸을까요?
누가 몽둥이를 들고 시킨 일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몬드리안은 보통 방식(?)으로 붓을 들면 보통 그림을 꽤 잘 그리는 화가였습니다.
이를 위해 20세기 초에 나름대로 인기를 끈 신지학(神智學)을 말해야 합니다.
몬드리안은 1909년 5월 신지학협회에 가입한 후 이 종교 같은 학문, 학문 같은 종교에 푹 빠졌습니다. 신지학은 모든 사물에 '보편적인 본질'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컨대 제각각 생김새를 갖는 건물들을 단순화하면 수직선과 수평선, 면이라는 '본질'로 이뤄졌다는 겁니다. 생김새가 모두 다른 사람들도 몸속에는 크게 다르지 않을 모양의 심장을 품고 있는 것처럼요.
몬드리안은 건물을 넘어 사물 전체가 결국은 수직선과 수평선, 면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몬드리안이 볼 때 곡선과 사선, 대각선은 외압에 따른 변형 내지 뒤틀림의 결과였습니다. 그가 수직선과 수평선을 뺀 모든 선의 종류를 싫어한 이유입니다.
피에트 몬드리안, 구성A
그런가 하면, 신지학은 빨강, 파랑, 노랑 등 삼원색만이 사물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색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삼원색을 잘 섞어야 만들 수 있는 색은 본질을 감추는 색일 뿐이었습니다. 몬드리안이 파랑과 노랑을 섞어야 나오는 녹색에 질색한 까닭입니다.
신지학의 가르침을 따른 몬드리안은 기실 화가라면 사물의 본질을 그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가령 건물을 그린다면 웅장한 겉모습도, 벽돌과 철근 등 속 모습도 아닌 건물의 본질, 건물의 영혼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다를 그린다면 장엄한 겉면도, 물고기와 해초가 나풀대는 안도 아닌 바다의 본질, 바다의 영혼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Composition VII
몬드리안은 그렇게 대상의 겉모습은 아예 미뤄두고 대상의 영혼만 담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은 '대상 재현'으로 요약할 수 있는 전통적 회화관을 무대에서 걷어찬 위대한 추상 화가라는 점에서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칸딘스키는 대상의 영혼을 담기보다 대상을 보고 느낀 뒤 찾아오는 자신의 감정을 그리는데 충실했습니다. 칸딘스키 표(標) '뜨거운 추상'은 감정이 물씬 담긴 촉촉한 추상화입니다. 율동감과 폭발하듯 흘러넘치는 역동성이 핵심입니다.
몬드리안 표 '차가운 추상'은요.
감정 따위는 한 방울도 섞지 않은 건조한 추상화입니다. 오직 질서, 오직 규칙뿐입니다. 대상의 영혼을 그리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내다 버립니다. 감정을 가라앉힌 채 천착(穿鑿)에 천착을 거듭하다 보니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몬드리안은 그런 점에서 해방, 폭발이 아닌 '절제'까지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화가라는 평도 받습니다. 무표정의 배우가 연기하는 영화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겁니다.
이쯤 되면 몬드리안이 자연을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도 짐작이 갑니다.
사시사철 모습을 바꿔대는 자연의 특성은 대상의 영혼을 찾으려는 그의 작업에 방해만 줬기 때문입니다. "이제 좀 감 잡았는데 나뭇잎 색깔이 또 달라졌어. 젠장!" 눈을 시뻘겋게 뜬 그가 분개하는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피에트 몬드리안, 붉은 나무, 1908
피에트 몬드리안, 회색 나무
피에트 몬드리안, 꽃 핀 사과 나무
몬드리안이 처음부터 극단적인 추상화를 그린 건 아니었습니다.
몬드리안이 1908년부터 그린 나무 연작입니다. '몬드리안 스타일'의 변화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재미있는 작품들입니다. 첫 그림은 분명 나무입니다. 나무줄기까지 정성껏 표현했습니다. 두 번째 그림은요. 나무라는 건 겨우 알아볼 수 있겠는데 확실히 좀 이상합니다. 생기가 하나도 없는 게 꼭 나무의 영정 사진 같습니다. 세 번째 그림은 더 심각해집니다. 나무가 거미줄 같은 선으로 산산이 조각났습니다. 곧장 "이건 근사한 나무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피에트 몬드리안, 꽃 핀 사과 나무
그리고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면 "이건 뭐…?"라며 말문이 막힙니다.
이게 나무랍니다. 점점 더 영적 모습으로 변해가던 나무의 형태는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이게 바로 당시 몬드리안이 엿본 나무의 본질이자 나무의 영혼이었습니다.
피에트 몬드리안.
이 양반도 보통은 아닌 듯한데?
그렇습니다. 몬드리안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고지식한데다 한 번 꽂히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고통에 익숙했습니다. 답답하리만큼 깨달음을 찾아 떠도는 화가였습니다. 중세에 살았다면 다수의 추종자가 있는 순례자의 삶을 살았을 겁니다.
몬드리안은 1872년 네덜란드 아메르스포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화가였던 삼촌 덕에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럴듯하게 그립니다. 아예 1892~1897년까지 암스테르담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교육까지 받습니다. 실력을 인정받아 한때 초등학교 교사 일도 했습니다.
피에트 몬드리안, 저녁의 풍차, 1905
피에트 몬드리안, 사구에서 바라본, 해변과 잔교가 있는 돔뷔르흐 풍경
몬드리안도 처음에는 자연미를 중시했습니다.
삼촌의 가르침 덕이었습니다(그의 대표작을 보면 아이러니하죠?). 직업 화가가 되기 위해 교편을 내려놓은 몬드리안은 직후 신지학에 심취합니다. 1911년께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몬드리안은 곧장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 등 '입체파 괴물'들의 그림을 뚫어지게 봅니다.
피에트 몬드리안, 빈켈 방앗간
"뭐야? 대상을 손톱만큼도 재현할 필요가 없었잖아?"
몬드리안은 자연주의의 가르침을 완전히 버립니다. 앞서 몬드리안의 나무 연작에서 봤듯, 그의 회화관은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몬드리안은 1차 세계대전(1914~1918) 탓에 다시 네덜란드에 둥지를 틉니다. 여기서 '2차 각성'의 기회를 마주하는데요. 몬드리안은 그곳에서 반데스버그(되스부르크), 리트벨트 등 예술가와 함께 '데 스틸'(De stijl·영어로 The Style)이라는 추상 그룹을 조직합니다. 이들은 같은 이름의 미술 잡지를 펴내 '영원불멸의 아름다움이란 단순하고 규칙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폅니다.
피에트 몬드리안, 생강단지의 정물
이 시기에 몬드리안은 특히 반데스버그의 영향을 크게 받는데요.
당시 반데스버그가 몬드리안에게 회화 작업 중 자의식을 없애는 법, 즉 감정을 배제하는 법을 재차 설파했기 때문입니다. 반데스버그는 몬드리안에게 "짜샤, 미술은 원래 장식 목적의 예술이라니까. 감정이 들어가면 금방 질릴 수밖에 없어!"라고 몰아쳤습니다.
반데스버그.
반데스버그는 사실상 '데 스틸'의 리더였습니다.
몬드리안은 그런 반데스버그의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들어보니 진짜 맞는 말 같기도 했습니다. 몬드리안은 고집불통이었지만, 신지학에 완전히 심취한 사례가 있듯 한 번 받아들이면 황소처럼 돌진했습니다. 이렇게 몬드리안의 전매특허인 '차가운 추상'의 마지막 단추가 달립니다. 몬드리안하면 떠오르는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같은 그림들은 '데 스틸' 활동 이후 제대로 꽃을 피웁니다.
반데스버그, counter composition XIII
두 사람 다 보통내기는 아니었던 만큼 박 터지게 싸운 적도 있습니다.
몬드리안이 반데스버그의 추상화를 보고 딴지를 건 겁니다. "왜 그림에 대각선을 쓰냐?"는 이유였습니다. 술 먹고 시비 건 게 아니고요. 진짜 궁서체의 돌직구였습니다. 반데스버그가 황당한 표정으로 몬드리안을 쳐다봅니다. 몬드리안은 "모든 사물의 본질은 수직선과 수평선인 거 몰라?"라며 쏘아붙입니다.
반데스버그는 타협의 필요성을 말합니다.
솔직히 모든 그림을 어떻게 수직선과 수평선만으로 그릴 수 있느냐는 겁니다. 대각선으로 역동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도 해봅니다. 대상을 그린 것도 아니고, 네가 극혐하는 녹색을 쓴 것도 아니잖아…. 반데스버그도 이렇게 물러나지 않습니다.
둘은 정말 진지하게 싸웠습니다.
결국 몬드리안이 "그래. 내가 양보한다!"라며 선심을 씁니다. "45도 각도만 그릴 수 있게끔 하자. 다른 선은 안 돼. 오케이?" 반데스버그는 몬드리안의 이 말에 고개를 젓습니다. "너는…. 너는 진짜 제정신이 아니야." 두 사람은 이렇게 결별합니다. 몬드리안도 이후 '데 스틸'에서 탈퇴합니다.
평생 순례자로 살았을 듯한 이 냉혈 인간의 혼을 쏙 빼놓은 게 있는데요.
바로 재즈 음악 '부기우기'와 춤입니다. 몬드리안은 2차 세계대전(1939~1945) 여파로 이번에는 미국 뉴욕으로 갑니다. 정신 차려보니 몸은 폭삭 늙은 상태였습니다. 그런 몬드리안은 나이를 잊은 채 뉴욕 곳곳에서 즐길 수 있는 '부기우기'와 춤, 가로와 세로로 반듯하게 만들어진 거리에 심장이 펄펄 뛰었습니다.
피에트 몬드리안,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1943
몬드리안이 그 감정을 살려 그린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입니다.
무수한 노란색 직사각형과 정사각형, 소수의 회색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이 눈길을 끕니다. 부기우기와 춤을 즐기는 사람들, 뉴욕 맨해튼의 고층 빌딩과 잘 닦인 도로 등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보고 있노라면 멜로디를 마구 두드리는 오른손, 한 마디에 8개의 음을 맹렬하게 쳐야 하는 왼손이 불러내는 부기우기 피아노 리듬이 느껴지는 듯도 합니다. 뉴욕 고층 빌딩에 올라 시가지 풍경을 봐도 꼭 이 그림 같은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주목되는 건 몬드리안이 드디어 고집을 꺾은 겁니다.
평생 고수하던 검은색 수직선과 수평선을 버렸습니다. 미국 음악과 뉴욕의 활기가 '차가운 추상'의 대가마저 녹였습니다. 몬드리안을 잘 아는 사람이면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이라며 진심으로 걱정했을 겁니다.
슬프게도 몬드리안은 '변화의 맛'을 오래 만끽하지 못합니다.
피에트 몬드리안, 승리의(빅토리) 부기우기(1944·미완성)
몬드리안은 뉴욕으로 이주한 지 4년 만인 1944년 폐렴에 걸려 눈을 감습니다. 71세였습니다. 몬드리안이 60대가 된 후에야 '평가'를 받기 시작한 점을 감안하면, 영광의 순간은 야속하리만큼 짧았습니다. 몬드리안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승리의 부기우기'는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 이는 연합군의 2차 세계대전 승리를 염원하며 작업하던 최후의 역작이었습니다.
[saint laurent]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삼성전자 제공]
'몬드리안 스타일'은 전 세계에 퍼져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디자이너로 꼽히는 프랑스 출신의 이브 생로랑은 1965년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을 생각하며 옷을 디자인합니다. 이 패션이 바로 '몬드리안 룩'입니다.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로 칭해지는 스위스 태생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몬드리안에게 영감을 얻어 실용적 건축 세계를 엽니다. 르코르뷔지에는 이후 현대적인 아파트 모델을 가장 먼저 도입한 인물로 군림합니다.
국내 기업 삼성도 여러 반도체 공장 벽에 몬드리안 스타일의 색상과 패턴을 칠해두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수의 미술 평론가가 아쉬워하는 점이 이겁니다. 몬드리안이 뉴욕에 조금만 더 빨리 왔었다면, 더 나아가 다른 개성 있는 도시도 가볼 수 있었다면, 어쨌거나 그가 작품 활동을 조금만이라도 더 오래 할 수 있었다면.
〈참고 문헌〉
아트인문학: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김태진, 카시오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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